전단 (제나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전단은 제나라 왕족의 먼 친척으로, 연나라의 침공으로 위기에 처한 제나라를 구원한 명장이다. 시장 관리직으로 시작하여, 연나라의 침공으로 즉묵을 지키며 이름을 알렸다. 연나라의 간계를 간파하고 화우계(火牛計)를 사용하여 70여 성을 수복하며 안평군에 봉해졌다. 이후 제나라 재상, 조나라 재상을 역임하며 활약했으나, 말년의 행적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사마천은 전단을 손자병법의 '처녀와 같고 탈토와 같다'는 구절로 평가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춘추 전국 시대의 장군 - 오기
오기는 중국 전국 시대의 군사 전략가이자 정치가로, 여러 나라에서 활약하며 군사적 업적을 세우고 초나라 재상으로 법가 개혁을 추진하여 부국강병을 이끌었으며, 《오자병법》을 저술했다. - 춘추 전국 시대의 장군 - 감무
감무는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혜문왕, 무왕, 소양왕 3대에 걸쳐 활약하며 군사적 공을 세웠으나, 참소를 받아 망명 후 위나라에서 생을 마감했다. - 기원전 3세기 중국 사람 - 장자
장자는 중국 전국 시대의 철학자로, 《장자》를 저술하여 개인의 자유와 무위자연의 삶을 추구했으며 노장사상으로 도교에 영향을 미쳤다. - 기원전 3세기 중국 사람 - 진 시황제
진 시황제는 중국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칭호를 사용한 인물로, 전국 통일 후 군현제 실시, 도량형과 문자 통일 등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구축했으나 분서갱유와 대규모 토목 공사, 불로불사 추구 등으로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는 논쟁적인 인물이다. - 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전단 (제나라) | |
---|---|
기본 정보 | |
![]() | |
인물 정보 | |
이름 | 전단 (田單) |
로마자 표기 | Tian Dan |
생몰년도 | 기원전 3세기 |
국적 | 제나라 |
직업 | 군인, 장군 |
작위 | 안평군 (安平君) |
활동 | |
주요 활동 | 거 (莒)와 즉묵 (卽墨) 방어, 연나라 군대 격파 및 제나라 회복 |
기타 | |
관련 인물 | 제 민왕 악의 |
2. 생애
2. 1. 초기 생애
전단은 본래 제나라 왕족인 전씨(田氏)의 먼 친척으로, 제나라 수도 임치(臨菑)에서 시장 관리직인 시연(市掾)을 지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6]2. 2. 연나라의 침공과 즉묵성 전투
기원전 284년, 제 민왕은 강력한 국력을 믿고 교만해졌다가 연나라의 명장 악의가 이끄는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악의가 지휘하는 연나라 군대는 제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제나라의 도읍인 임치를 함락시켰고, 제 민왕은 거로 달아났다.[7] 전단 또한 안평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그곳에서 가족들에게 수레바퀴 축의 양끝을 잘라내고 쇠를 씌우도록 하였다. 이후 연나라 군대가 안평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많은 제나라 사람들이 포로로 잡혔으나, 전단과 그 가족들은 미리 수레바퀴를 쇠로 보강한 덕분에 무사히 동쪽의 즉묵으로 탈출하여 그곳을 지켰다.[8]이후 악의는 5년에 걸쳐 제나라를 공격하여 70여 성을 빼앗았고, 제나라에 남은 성은 거와 즉묵뿐이었다.[9] 거에는 악의에게 패하고 달아난 제 민왕이 머무르고 있었으나 초나라에서 구원병을 거느리고 온 장군 요치(淖齒)에게 살해당했고, 이후 그 아들인 제 양왕이 뒤를 이어 거를 지켰다.[10] 한편 즉묵의 대부(大夫)가 연나라 군대와 싸우다 전사하자, 즉묵 사람들은 안평에서 지혜를 발휘했던 전단을 장군으로 추대하였다.[11]
기원전 314년, 연나라의 재상 자지가 왕에게 반역을 일으키면서 연나라 내에서 내분이 발생했다. 제나라의 제 선왕은 연나라의 약화된 방비를 틈타 연나라의 수도인 기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기원전 286년, 제 민왕은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합병했지만, 이로 인해 다른 제후국들의 제나라에 대한 적대감이 커졌다. 연 소왕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제나라에 대항하는 군사 동맹을 결성했고, 악의가 지휘하는 연나라와 동맹군의 군대는 제나라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 70개의 도시를 점령했다. 즉묵과 거 두 도시만이 제나라의 소유로 남았다.
2. 3. 반간계와 연나라 군대의 혼란
기원전 279년, 연 소왕이 죽고 연 혜왕이 즉위하자, 전단은 혜왕과 악의의 불화를 이용하여 반간계를 펼쳤다.[12] 전단은 첩자를 풀어 "악의는 제나라의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있으며 때문에 아직도 거와 즉묵을 함락시키지 않고 있으니, 제나라 사람들은 연나라에서 다른 장수가 파견되어 제나라를 무너뜨릴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12] 이에 속아넘어간 연 혜왕은 악의를 불러들이고 대신 기겁을 제나라 전선으로 보냈다.[12] 악의는 결국 조나라로 망명하였고,[13] 연나라 군대는 연 혜왕의 조치에 큰 불만을 품었다.[14]2. 4. 사기 진작과 화우계(火牛計)
전단은 연나라 군대의 사령관이 악의에서 기겁으로 교체되자, 스스로 신령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는 한 병사를 신인(神人)으로 위장시켜 그를 스승으로 삼고 자신은 그의 말을 듣는다고 주장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다.[15] 또한 성내 사람들에게 식사 때마다 집 뜰에서 조상을 제사 지내게 하여 제물을 노리고 모여든 새들을 보고 "신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라고 선포했다.[2]전단은 첩자들을 시켜 "연나라 군대가 제나라 포로들의 코를 베고 조상의 무덤을 파헤칠 것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기겁이 이 소문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자 제나라 군사들과 백성들은 분노하여 항복을 거부하고 복수를 원하며 단결하여 사기가 크게 올랐다.[15][2]
전단은 군사들의 사기가 높아지자, 몸소 삽을 들고 병사들과 함께 일하고 여인들을 병사들과 같은 대오에 편입시켜 음식을 나누어 먹이는 등 군사들을 격려했다.[16] 또한 성벽 위에는 노약자와 아녀자들을 올려보내고, 사신을 보내 연나라에 거짓 항복을 청하고, 즉묵의 부자들을 시켜 기겁에게 돈을 바치며 항복 후의 안전을 보장받게 하여 연나라 군사들을 방심시켰다.[16]
기원전 279년, 전단은 성 안의 소 1천여 마리를 모아 뿔에는 칼날을, 꼬리에는 기름 먹인 갈대를 매달고 붉은 비단에 용 무늬를 그려 입혀 한밤중에 꼬리에 불을 붙여 연나라 군대를 기습하는 화우계(火牛計)를 사용했다. 5천 명의 군사들이 소의 뒤를 따르고 성안에서 북과 함성소리가 울려 퍼지자, 연나라 군대는 크게 패하고 기겁은 전사하였다.[17] 이로 인해 "화우지계(火牛之計)"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한 번의 싸움으로 연나라 군대를 궤멸시킨 전단은 연나라에게 빼앗긴 제나라의 70여 성을 되찾고 제 양왕을 수도 임치로 모셔와 나라를 다스리게 하였다.[18]
2. 5. 제나라 수복과 안평군 책봉
전단은 연나라 군대를 궤멸시킨 후 연나라에게 빼앗겼던 제나라의 70여 성을 모두 되찾았다.[18] 제나라 군사들은 연나라 군대를 북쪽으로 몰아냈으며, 그들이 지나가는 모든 도시들이 전단에게 합류했다.[2] 거(莒)에 머물던 제 양왕은 수도인 임치로 돌아와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고,[18] 전단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를 안평군(安平君)에 봉했다.[18] 이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전단은 제나라의 상국(相國)이 되었다.[19]전단은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한번은 길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노인에게 자신의 옷을 빌려준 적이 있었다. 이를 알게된 제 양왕은 전단이 인심을 얻어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고 의심하여 그를 처형하려 했으나, 측근의 간언으로 뜻을 접었다.[4]
당시 전단이 즉묵에서 꼬리에 불을 붙인 소떼로 기겁을 격파한 일로 인하여 "화우지계(火牛之計)"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다.[17] 사마천은 "『손자병법』의 '시작은 처녀와 같아 적에게 문을 열게 하고, 나중에는 탈토와 같아 지킬 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전단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라고 평했다.[2]
2. 6. 적인(狄人) 정벌과 노중련(魯仲連)과의 일화
연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제나라를 구원한 직후에 전단은 적인(狄人, 오랑캐)을 정벌하고자 하였다. 이때 전단이 제나라의 현자인 노중련을 찾아가 조언을 청하자, 노중련은 전단이 오랑캐를 공격해도 이기지 못할 것이라 답했다.[20] 노중련은 이전에는 전단이 몸소 삽을 들고 병사들과 함께 하였으므로 장군과 사졸들이 함께 죽을 각오로 싸움에 임하였으나 지금은 전단이 부귀해져서 병사들과 함께 죽을 각오를 하지 못하니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고 설명했다.[20]그 조언을 새겨들은 전단은 이튿날에 앞장서서 적의 성곽을 순시하며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북을 울리며 군사들을 격려하여 마침내 적인들의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20]
2. 7. 요성(聊城) 함락과 노중련의 지혜
이후 전단은 과거 연나라에게 빼앗겼던 제나라의 땅인 요성(聊城)을 공격하였으나 1년이 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였다.[21] 당시 요성을 지키던 연나라의 장수는 모함을 당하여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결사항전을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정을 알게 된 노중련은 연나라의 장수에게 편지를 보내서 어차피 요성이 고립된 상황이라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니, 연나라로 돌아가거나 제나라에 항복하는 길 중 하나를 택하도록 설득하였다.[21] 연나라의 장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번민하다가 자살하였고, 이로 인해 요성이 혼란에 빠지자 전단이 그 틈을 타서 이를 함락시켰다.[21] 전단은 돌아와서 노중련을 관직에 앉히고자 하였으나, 노중련은 이를 거절하고 도망쳐 은둔하고 말았다.[21]2. 8. 제 양왕과의 갈등과 충신 초발(貂勃)
전단은 초발(貂勃)이 자신을 소인(小人)이라 비방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를 연회에 초대하여 이유를 물었다. 초발은 제 양왕의 총신들이 전단을 공격할 것을 경고했고, 전단은 다음날 제 양왕에게 초발을 천거하여 관직을 주었다.[22]제 양왕의 총신들은 전단을 모함하기 위해 초발을 초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초발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총신들은 초발이 전단의 세력을 믿고 오지 않는 것이며, 전단이 역모를 꾀한다고 참소하였다. 제 양왕은 전단을 불러 추궁했으나, 5일 만에 무죄로 풀어주었다.[23]
초발이 돌아온 후, 제 양왕과의 술자리에서 초발은 제 양왕이 전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꾸짖으며, 주 문왕과 제 환공도 공신을 우대했다는 점을 들어 전단을 존중해야 한다고 간언했다.[24] 제 양왕은 초발의 말을 듣고 전단을 참소한 총신들을 처형하고, 전단에게 봉읍 1만 호를 더했다.[25]
이러한 내용은 과거 연나라가 침공했을때 제나라를 지원해준 초나라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초발을 사신으로 보내면서, 초발이 며칠이 지나도록 제나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또한, 제 양왕은 전단이 백성들에게 인심을 얻어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고 의심하기도 했지만, 측근의 간언으로 뜻을 접었고, 이후 초발의 간청으로 전단의 공적을 인정하여 상을 더했다는 기록과도 연결된다.[4][5]
2. 9. 조사(趙奢)와의 병법 논쟁
기원전 269년, 전단은 조나라의 명장인 조사와 병법에 대해 논하였다. 전단은 군사의 수를 3만 정도면 충분하다고 주장하며, 조사가 10~20만이나 되는 많은 군사를 동원하는 것에 반대했다.[26]이에 조사는 오나라(吳)의 간지검(干之劍, 간장검)을 예로 들며 반박했다. 조사는 "3만 병력으로 강한 나라의 군대에 응한다면 칼로 기둥이나 돌을 때리는 것과 같다"고 말하며, 옛날과 현재의 시대적 상황이 다르므로 많은 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27] 전단은 조사의 말에 크게 탄식하며 수긍하였다.[27]
2. 10. 조나라에서의 활동
기원전 265년, 전단은 조나라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하여 중양(中陽)을 빼앗았다.[28] 당시 조나라 재상 평원군은 제나라에 전단을 장수로 보내는 조건으로 제수(濟水) 동쪽의 3개 성과 57개 읍을 할양했다. 조사는 뒤늦게 이를 알고 평원군에게 따지며, 전단이 어리석으면 연나라에 당하지 못할 것이고, 지혜롭더라도 조나라를 위해 전력을 다하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다. 조사의 예측대로, 전단은 그해 여름 겨우 세 개의 작은 성만을 함락시켰다.[29]기원전 264년, 전단은 조 효성왕에 의해 조나라 재상에 임명되었다.[30] 이후 전단의 행적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사마천은 "『손자병법』의 '시작은 처녀와 같아 적에게 문을 열게 하고, 나중에는 탈토와 같아 지킬 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전단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3. 평가
참조
[1]
웹사이트
Characters of the Warring States Period: Tian Dan (战国时人物:田单)
http://military.chin[...]
MilitaryChina.com
2010-11-06
[2]
웹사이트
Shiji 82 - Biography of Tian Dan
http://classical-chi[...]
2014-05-11
[3]
서적
『戦国策』巻13「襄王立,田單相之。」
[4]
서적
『戦国策』巻13「過菑~乃賜單牛酒、嘉其行。」
[5]
서적
『戦国策』巻13「王有所幸臣九人之屬~邑萬戸。」
[6]
서적
《사기》 권82 전단열전
[7]
서적
《사기》 권46 전경중완세가 ; 《사기》 권80 악의열전
[8]
서적
《사기》 권82 전단열전
[9]
서적
《사기》 권80 악의열전
[10]
서적
《사기》 권46 전경중완세가 ; 《사기》 권80 악의열전
[11]
서적
《사기》 권82 전단열전
[12]
서적
《사기》 권80 악의열전 ; 《사기》 권82 전단열전
[13]
서적
《사기》 권80 악의열전
[14]
서적
《사기》 권82 전단열전
[15]
서적
《사기》 권82 전단열전
[16]
서적
《사기》 권82 전단열전
[17]
서적
《사기》 권82 전단열전
[18]
서적
《사기》 권46 전경중완세가 ; 《사기》 권82 전단열전
[19]
서적
《전국책》 권13 제책6 〈초발상악전단〉
[20]
서적
《전국책》 권13 제책6 〈전단장공적〉
[21]
서적
《사기》 권83 노중련추양열전
[22]
서적
《전국책》 권13 제책6 〈초발상악전단〉
[23]
서적
《전국책》 권13 제책6 〈초발상악전단〉
[24]
서적
《전국책》 권13 제책6 〈초발상악전단〉
[25]
서적
《전국책》 권13 제책6 〈초발상악전단〉
[26]
서적
《전국책》 권20 조책3 〈혜문왕삼십년〉
[27]
서적
《전국책》 권20 조책3 〈혜문왕삼십년〉
[28]
서적
《사기》 권43 조세가
[29]
서적
《전국책》 권21 조책4 〈연봉송인영분위고양군〉
[30]
서적
《사기》 권43 조세가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